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산동파병 (문단 편집) === 중국의 반응과 일본군의 증강 === [[장쭤린]]의 [[북양정부]],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 모두 내정간섭이라는 이유로 1차 산동파병에 대해 격렬히 항의했다. 이중에서 제일 항의가 강경했던 쪽은 혁명외교를 고수하던 우한 국민정부였는데 우한 측은 일본군의 산동 파병은 조계지의 병력을 증파한 영국의 파병보다 악랄한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21개조 요구]]를 부활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상하이를 중심으로 곳곳에서 반일단체가 조직되어 일본 상품 불매운동, 일본 상점과 은행에 대한 거래 중지, 일본 기선 승선 금지 운동이 벌어졌다. 일본 내부에서도 시기상조, 내정간섭이라는 비판이 있었기 때문에 육군대신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사태가 절박하지 않은 이상 군대를 칭다오에 머물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국민당의 적화를 우려하고 있던 열강은 일본의 1차 산동파병에 대해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중국의 어느 정부도 일본의 산동파병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할 여력이 없었다. 북벌을 막는데 급급한 북양정부는 말할 것도 없었고 난징 정부도 우한과 봉천군벌을 동시에 적대할 수 없었으며 우한 정부는 산동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극심한 경제위기와 더불어 [[마일사변]]을 비롯한 내부의 국공갈등으로 인하여 실질적인 대응은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장쭝창과 쑨촨팡의 일본의 원조로 병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할 수 있었다. 다나카 기이치는 봉천총영사 [[요시다 시게루]]에게 훈령하여 장쭤린 측의 정세를 살펴보도록 했는데 요시다는 장쭤린의 총참의 [[양위팅]]가 회담한 이후 장쭤린이 국민당에 대항할 힘이 없다고 보고했고 장쭤린이 패하면 동북의 안정도 상실될 것이니 일본이 열강과 함께 진포철로, 경한철로, 교제철로를 점령하고 간섭하여 북벌을 중지시켜야 한다고 의견을 올렸다. 이에 다나카는 영국에 주요철로를 공동 점령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영국은 이를 거절했다. 6월 23일, 국민혁명군이 산동에 대한 총공격을 실시하여 태아장, 임성, 임기를 잇달아 점령하고 7월에는 교주에 주둔한 쑨촨팡의 부하 진이영이 국민당에 투항하여 교제철로를 장악했다. 이를 본 관동군은 2200명의 병력을 만주에서 칭다오로 증파하는 한편 3천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제남을 점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